생(生)과 사(死)의 기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
살다 보니 문득문득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있다.
때로는 바라보는 것에서 나아가 그 문턱에 다가서 있는 자신이 있다.
죽음의 문턱이란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자의 혹은 타의로 절벽에 내몰려지듯 다가선 문턱에선,
선뜻 외면하기 어려운 공포가 맞이해온다.
생이 끝나기 전까지 대면하여 느껴야 할 고통.
나 가고 남겨질 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혹여 성공하지 못하였을 때 감당해야 할 후폭풍.
각자가 처해진 환경에 따라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겠으나
기필코 찾아오게 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문턱을 바라보게 되고 기웃거리게 되는가 하면, 그 만큼 내 삶이 녹록치 않음이라. 그저 산다는 일이 눈을 감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라.
반면, 그렇게 삶을 견뎌내는 것이 눈을 감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느껴짐에도 죽음의 문턱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이유는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 이라는 영역이 살고 싶다 소리 없이 외치고 있기 때문이라.
즉 또 다른 나는 살고 싶다 외치고 있음이라.
하여 다행이라 할 것이다.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요.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 했을지언정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
하여 아직 삶은 끝난 것이 아니요.
하여 아직 삶의 기회가 있다는 뜻이라.

정녕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정녕 삶의 의지가 온전히 사라져 있었다면,
이 글을 쓰고 남기고 있었을 이 자리에 없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역시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이요.
기로의 끝에서 돌아온 자로서 이렇게 글을 작성하고 있기 때문이라.
빛바랜 기억 속 과거를 되돌아 보면, 낡은 기억 속 20대 초반의 나는 삶의 끝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삶의 종지부를 찍을 곳으로 군대로 정했고, 그리고 그 사실이 기쁠 일은 아닐 것이기에 나의 입대는 알려야 할 사실이나 이벤트 거리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군이라는 곳에 들어가 싸늘한 주검으로 나올 생각이었으니 알릴 필요가 어디 있으랴. 그렇기에 그때의 나는 주변의 지인들이나 친인척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함께 살았던 어머니와 가장 친했던 서너 명의 친구에게만 "갔다 올게"라는 인삿말을 남기고 사귀던 이성과 헤어지고 입대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삶을,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삶의 종지부를 찍고자 한 것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더 더욱이 큰 감흥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어떤 의미로는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품고 간 입대였으니 오죽하랴.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군 생활에서 결국 스스로 의도한 죽음에 가장 가까워진 순간은 이윽고 찾아 오고 말았다.
모든 미련이 사라져 버린 순간.
모든 의미와 가치가 사라져 버린 순간.
태산 같이 높고도 가팔라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 했을 때 감당해야 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 마냥 눈 녹듯 사라지고, 더 이상 삶의 종지부를 찍는데 실패한다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들은 어느새 태산 같은 존재에서 얇디얇은 종잇장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애써 위태롭게 이 삶을 이어주고 있던 얇디얇은 종잇장 같은 미련이 마음속에서 찢어지고 바스라지고 잿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 이제 안녕이요 영원한 안식으로 다가서고 있는 내 발걸음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마침표를 찍기 위한 나의 선택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대로 홀로 사라질 것인지.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동반자를 만들어 함께 갈 것인지.
그것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어와 형광등을 켜거나 끄는 것과 같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행동이요. 단순하게 스위치를 켜고 끄는 행위에 불과했다.
단 한걸음.
그 한걸음만 내딛었다면.
나의 세상은 그렇게 암전되었을지 모른다.
그저 마지막의 그 한걸음만 내딛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날 살린 사람이 있었다.
과거에도 날 살렸고 그 마지막 순간에 나를 살린 사람.
그 순간 내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곁에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이고,
거칠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에 나를 내어 놓은 사람.
여인의 몸으로 지아비 도움없이 자녀를 키운 사람.
생활비와 양육비를 벌기 위해 배우며 일하였던 사람.
일이 바뀌어 몇 일 집을 비울 때면,
혹여 배라도 곪을까 5일분의 쌀밥을 지어 놓던 사람.
자식에겐 늘 믿는다. 사랑한다 말해주었던 사람.
자식에게 욕을 하기보다는 속으로 삼키며 인내했던 사람.
잘해준 것들을 내세워 생색내기보단,
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표현했던 사람.
자녀들만 보고 그 고되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을 실천하고 보여준 사람.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으로 나를 살게 한 사람.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으로 날 붙잡았던 사람.
나의 어머니.
나의 부모.

다시 한 번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는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찢어지고 바스라져 잿가루가 되었던 미련은 시간을 되감은 듯 되살아난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그렇게 떨어져서도 나를 사랑으로 살려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삶의 끝을 바라보고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헤매는 시간을 겪는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 일 수도 있고 부모 혹은 자녀일지 모른다.
삶의 끝을 바라보고 생과 사의 기로에 접어들었던 이는 헤매는 시간을 오래 보냈을 수록 더 자주 기웃거리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삶을 끝내는데 실패했을 지언정 다음에는 성공하여 남은 이들을 슬프게 할 지도 모른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따스하게 품어 주어 내게 있어 나의 어머니와 같이 그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한 명이 삶을 놓을 수 없는 미련을 만들어 이 세상에 머무를 이유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들은 조금은 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끝.